제 블로그를 통해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일은, 혼잣말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라는 판결문을 접하신 분이 계시겠지요. 그 판결문을 쓰신 박주영 판사님의 『어떤 양형 이유』 중 필사한 부분을 일부 공유합니다.
『어떤 양형 이유』 중 「부탁받은 정의」의 후반 부분을 발췌하였으며, 『어떤 양형 이유』에서 전문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박주영 판사님의 판결문 포스팅 링크도 함께 첨부합니다.
https://theinforaven.tistory.com/39
(전략)
여전히 정의의 실체를 정확히 모르지만, 오랜 기간 이 바닥에 있으면서 그 실루엣 정도는 이해했다고 믿고 싶다. 내가 생각하는 실전 정의의 어렴풋한 실루엣은 이런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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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천국이 나의 지옥이 되고, 나의 천국이 당신의 지옥이 되는 곳은 정의를 논하기 어렵다. 당신의 천국은 그대로인데 나는 생지옥이 되는 곳은 정의가 무너진 곳이다. 당신의 천국은 약간 출렁였지만 나도 천국이 되는 곳이 정의가 선 곳이다. 정의는 치킨게임이 아니라 윈윈게임win-win game이거나 논제로섬게임non-zero sum gam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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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국민권익위원장인 박은정 교수는 “인간은 모든 존재이해의 접점”이라고 했다. 인간이 배제돼 있거나 인간보다 더 우월한 존재나 가치가 등장한다면 불의를 의심해야 한다. 설령 신이라 할지라도 그렇다. 한 사람이 이로워지는 것보다 많은 사람이 이로워지는 것이 정의일 가능성이 높다. 여러 사람이 고통받는 것보다 한 사람만 고통받는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한 사람의 고통이 많은 사람의 고통을 넘어설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불의의 입장이다. 정의는 극한의 고통에 빠진 소수자의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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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정의는 열려 있고 부끄러움을 안다. 닫힌 입장은 불의의 영토거나 중간지대쯤이다. 독선과 아집은 설령 그것이 정의라 하더라도 사방이 천길 낭떠러지다. 정의는 수고로움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는다. 적당히 타협하고 물러서는 순간 불의의 영토에 발 들이기 쉽다. 불의는 언제나 그곳에 있다. 정의는 염치를 안다. 나를 생각하듯 타인의 입장도 생각해야 한다. ‘내로남불’의 행동은 정의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높다. 혼자 가는 곳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라는 안수환의 시구처럼(<한 줄>) 공동선을 생각하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행동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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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는 대체로 직관적이다. 복잡한 설명으로만 정당화될 수 있다면 일단 의심해봐야 한다. 진실과 성과를 지나치게 강조해선 안 된다. 진실은 악마의 상용구이기도 하다. 인간은, 진실을 찾는다는 명분과 선한 결과라는 대의 아래 사람을 모질게 고문하고, 인종청소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그 결과 발견한 것이 진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정의라고 부를 수는 없다. 미국 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은 “궁극적으로 실패에 이를 대의에 성공하느니, 차라리 궁극적으로 성공에 이를 대의에 실패하겠다”고 했다. 정의는 눈앞의 대의(이익)에 연연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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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변이 화려하고 유창하다면 의심스럽다. 법정에서 오랜 기간 지켜본 정의는 대체로 어눌했다. 진실과 정의는 유려한 언변으로 치장되지 않더라도 발광發光한다. 양보와 호혜가 절대적인 양 몰아가는 것도 석연치 않다. 정당한 분노와 적의는 정의다. 희생의 대가로 군림하고 굴종을 요구한다면, 비록 그것이 사랑이라 할지라도 정의롭지 못하다. 아니, 그것은 사랑도 아니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듯 서두른 정의도 정의가 아닐 수 있다. 정의에는 적기가 있다. 정의의 민낯을 보려면 기다림이 필요할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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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 허용한 권리는 일단 정의로 추정된다. 죄가 명백해 보임에도 무죄를 주장했다고 형을 높이는 것은 부당하다. 무죄 주장은 피고인의 권리고, 피고인은 형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다. 괘씸죄는 없다. 괘씸하냐의 판단은 재판부가 아닌 피해자의 몫이다. 죄를 부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피해자에게 더 큰 고통을 가했기 때문에 형이 높아지는 것이다. 반대로, 법이 허용했으니 무조건 정의에 부합한다고 속단해서도 안 된다. 불이익변경금지의 원칙처럼 법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자크 데리다가 지적한 것처럼, 법은 항상 자신이 정의라고 주장하지만 법은 절대적 정의에 도달할 수 없다. 법은 언제나 해체했다 재구축할 수 있지만, 정의는 해체나 탈구축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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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득을 가져가거나 위험과 희생을 타인에게 전가한 사람은 큰 책임을 져야 한다. 이득이 큼에도 책임이 작은 곳은 불의의 영역이다. 《정의를 부탁해》 를 쓴 권석천은 “형사책임이 힘의 서열 역순으로 재분배되는 건 정의가 아니”라고 했다. 실제로 평등한가를 가리기는 어렵지만, 평등하게 취급하는 것은 좀더 수월하다. 절차는 더 그렇다. 절차적 평등이 무너진 곳에 정의가 자리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규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정의에 대한 탐구를 포기하는 곳에 정의가 있을 수 없다. 단번에 찾기 어렵다면 정의를 감싼 불의를 일일이 걷어내는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예외 없는 법은 불의를 내포할 가능성이 높다. 예외가 있다고 다 옳은 것도 아니다. 예외는 소수자나 사회적 약자의 몫이다. 법해석의 신축성은 아래로만 늘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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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써놓고 보니, 내 정의론은 더할 수 없는 잡탕이고 짬뽕이다. 내 안에 아리스토텔레스도, 벤담도, 롤스도, 드워킨도 다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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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팍한 세상살이에 시달리다 보면 정의로 밥벌이하는 나조차도 ‘먹고살기 힘들어 죽겠는데 정의는 개뿔’이라는 말이 목구멍에서부터 그렁거릴 때가 있다. 그래도 포기할 순 없다. 인간의 삶은 정상에서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영원히 굴려올리는 시시포스와 비슷하다. 굴러떨어질 줄 알면서도 끊임없이 바위를 굴려야 하는 숙명은 가혹하지만, 바위 굴리기를 멈추면 시시포스는 바위에 깔려버릴 것이다. 그 순간 그의 실존적・상징적 존재는 사라진다. 시시포스는 바위를 굴릴 때라야만 시시포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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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시인은 1968년 부산에서 열린 문학세미나에서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라고 했다. 나는 인생도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흙바닥에 널브러져 누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사멸하듯 우리도 한줌 흙으로 돌아가겠지만, 그걸 알면서도 바위를 굴리고, 흙바닥을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 그것이 인생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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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바닥을 뒹굴지라도, 부정과 불의, 협잡과 편견, 전관예우와 유전무죄의 선동이 판치는 아수라 같은 진창에 머물더라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정의를 회의하거나 냉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공동선과 미덕과 하나의 정답이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가치의 충돌로 절대가치와 정답이 잘 보이지 않더라도, 섣불리 상대주의나 회의주의의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된다. 정답으로 채택되지 않은 가치가 정의가 아니라거나 무시해도 좋다는 말이 아니다. 모두 다 소중한 가치이므로 고민할 만한 것이지만, 상대주의나 회의주의에 빠지면 최선의 정의를 찾는 여정을 쉽게 그만둘 가능성이 높다. 그것이 불의의 노림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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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는 고정된 방위가 없고,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뚜렷한 실체 없는 신기루이자 한 마리 파랑새 같다. “사유의 내용은 의심할 수 있어도 사유한다는 사실과 사유하는 주체로서의 나의 존재만은 의심할 수 없다”는 데카르트의 말을 빌리자면, 정의는 의심할 수 있지만 정의에 대한 열망을 품은 인간 그 자체는 결코 의심할 수 없다. 어쩌면 절대적으로 곧고 바른 유일한 것은 미덕이나 공동선이 아니라, 아무리 험난한 길이라도 바르게 살려는 의지를 갖고 그 길을 끊임없이 고뇌하며 걸어가는 존재, 그 자체가 아닐까? 그렇다면 정의는, 목표가 아니라 여정이고, 정의로운 삶을 살려는 열망을 품은 인간 그 자체다. 부정과 불의의 바윗덩이를 영원히 치우는 시시포스, 파랑새가 있다는 믿음을 갖고 묵묵히 길을 걷는 우리가 바로 정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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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새는 있다.
정의도 있다.
정의가 뭔지 잘 모르지만 열심히 창고를 뒤지는 창고지기가 있다.
창고지기의 보고서는 거짓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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