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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

[필사] 날 떠나지 마세요 / 김진관

by 정보까마귀 2022.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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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에서 지워진 김진관 심리칼럼을 옮겨적습니다.


심리적 덫은 아동기의 비극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시작되어 인생 전반에 걸쳐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는 묘한 심리적 패턴입니다. 아동의 심리에 깊이 각인된 이 패턴은 스스로 자각하기 어려울 뿐더러 성인이 된 후 그 실체를 알기도 어렵지만 알게된다 해도 쉽사리 떨쳐내기 어려운 마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번 칼럼에서는 ‘버려지는 두려움(유기불안)’이라는 덫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제프리 영 박사가 자신의 치료 경험을 토대로 그의 책에 제시한 여러 가지의 사례를 인용하겠습니다.

28세의 에이미는 남편을 잃게 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7세 때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평소 따뜻하고 자상하던 아빠의 갑작스런 죽음은 싶은 상처를 각인시켰고 그 상처는 성인이 된 후에도 에이미를 따라다닙니다. 남편이 사업 상 출장을 떠날 때마다 에이미는 울면서 매달립니다. 남편이 출장을 가 있는 동안, 에이미는 공포에 질려 있거나 울고 있습니다. 초조함을 이기지 못해 매 시간마다 전화를 하고 목소리를 들어야 진정이 됩니다. 그런데 막상 출장에서 돌아왔을 때에는 남편에게 극도로 화가 나 있으며 심지어 더 이상 남편이 꼴도 보기 싫다는 느낌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차가운 태도를 보입니다. 에이미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든 감정의 반전입니다.

35세의 패트릭은 아내가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는 불운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런 불행이 그의 인생에서 첫 번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8세도 되지 않던 페트릭에게 어머니는 이미 심각한 알콜 중독자였습니다. 폭음을 일삼던 어머니가 홀연히 집을 떠나 몇일 동안 보이지 않는 일은 예사였습니다. 언제 돌아올 지 확신할 수도 없었습니다. 집에서 술을 마시는 날에도 아들은 전혀 안중에 없었습니다. 패트릭은 언제나 혼자라고 느꼈습니다. 성인이 되어 결혼했는데,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아내는 늘 약속하지만 그녀의 남성 편력은 그칠 줄 모릅니다. 아내가 집을 나가는 일이 점점 잦아지고 어릴 적 엄마를 기다렸던 그 마음으로 패트릭은 아내를 기다립니다.

32세의 린지는 한 사람과의 관계가 끝나기 무섭게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시작합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정착을 하지 못하면서 그녀의 로맨스는 계속됩니다. 그녀는 자신의 매력을 잘 발산하고 어떤 관계에서건 강렬한 감정을 쏟아 부으면서 금새 연인 관계로 돌진합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두려움을 느끼면서 그 관계를 재빨리 끝내버립니다. 제프리 영 박사가 기억하는 린지는 치료에 와서도 매우 빠르게 마음을 열고 강한 감정을 쏟아냈고 고작 몇 차례 상담을 했을 뿐인데 이미 몇년 간 치료받아 온 내담자처럼 느껴졌다고 합니다.

‘유기불안’이라는 심리적 덫에 빠진 사람들은 애착을 느낄 정도로 가까워진 사람이 때가 되면 틀림없이 자신을 떠나버릴 것이고 자신에게는 결국 감당하기 힘든 황망함과 외로움만 남겨질 것이라는 강하고 불길한 예감을 갖고 있습니다. 한번 멀어진 사람은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는 믿음 또한 매우 강렬합니다. 이런 덫에 빠지게 되면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절망의 또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지금 현재 아무리 달콤해도 그 달콤함은 결국 종국의 절망적인 외로움을 더 깊게 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현재가 달콤할 수록 머지 않은 상실을 예감하는 그들의 두려움은 더 깊어집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내게 특별해진 사람과 잠시 떨어져 있어도 관계가 지속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오히려 잠시 떨어진 사이 느끼는 서로에 대한 간절함이 관계를 더 공고히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유기불안이라는 덫에 갇힌 사람들에게는 두 사람을 이어주는 단단한 끈이 눈 앞에 보이지 않으면 두려움으로 인해 마음의 안정감을 쉽게 잃습니다. 에이미는 남편이 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서는 순간 그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 상상을 먼저 하곤 합니다. 또한 린지는 파트너가 자신에게 약간만 소홀히해도 절망감에 휩싸이고 상대에 대한 분노가 끓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아주 작은 틈새라도 에이미와 린지의 마음을 온통 헤집어 놓을 수 있습니다.

유기불안이라는 심리적 덫은 그리 끈끈하지 않은 대인관계에서는 잠잠하다가 친밀한 관계 안에서 모습을 뚜렷하게 드러냅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이 멀어진다고 느낄 때 날카로운 발톱으로 깊은 상처를 내기 시작합니다. 이미 버림을 받은 것이나 다름 없다는 느낌이 강렬하여 마음을 깊은 혼란에 빠뜨립니다. 예를 들어, 린지는 어느 파티에서 파트너가 자신의 말에는 진지하게 응답하지 않고 옆에 있던 다른 여인에게 친절한 태도를 보인 순간 폭발하기 시작합니다. 자리를 박차고 나와 절망감과 분노에 휩싸입니다. 린지는 파트너가 그 여인에게 매료되었다고 확신한 나머지 파트너에게 온갖 분노를 쏟아붓습니다. 파트너는 충분한 해명을 듣지도 못한 채 혼동에 빠졌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냉랭해지는 린지가 자신에게 걸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판단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린지의 불길한 예감은 어김없이 현실이 되고 맙니다. 이렇게 반복되는 패턴이 린지의 ‘버려지고 말거야’라는 믿음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유기불안이 자라나는 환경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1) 너무 안전하게 보호되고 완전하게 의존하는 환경에서도 버려지는 두려움이 각인될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의존성(dependence)’이라는 심리적 덫이 추가로 자라나게 됩니다. 이들은 혼자 힘으로 생존해나갈 수 없다는 뿌리깊은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정서적으로 깊이 연결된 사람을 잃었을 때 ‘내게 아무 것도 남지 않은 텅 빈 느낌’을 견디기 힘들고 누군가를 찾아 마음을 의존하기 시작해야만 두려움이 가라앉습니다. 두려움이 강할 때에는 현재 의존하고 있는 대상이 훌쩍 떠나버릴 경우를 대비해서 여러 명을 소위 예비 자원으로 관리하고 있어야 안심을 하기도 합니다.

유기불안 도식이 자라나는 또 다른 환경은 (2) 정서적으로 깊이 연결된 애착 대상을 갑자기 송두리째 잃어버린 경험을 한 경우입니다. 애착 대상을 잃어버린 아픔은 그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고통입니다. 특히 보호받지 못하면 어쩔줄 모르는 어린 아이로서는 소화시키기 어려운 고통입니다. 어른은 애착 대상을 잃어도 자신과 세상에 대한 느낌이 온통 다 변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어린 아이의 경우에는 인간 세상의 모든 것과의 연결이 다 끊겨버린 상태가 되며 이것은 마치 전기가 끊겨 암흑 천지가 되어버린 황량한 도시에 홀로 버려진 것 같은 느낌입니다. 한마디로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이며, 생존에 큰 위협이 온 것입니다.

환경 이외에도 아이의 타고난 기질 역시 심리적 덫의 발달과 심각성에 큰 역할을 합니다. 애착 대상을 잃었을 때의 심리적 충격과 정서적 고통이 아이들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유난히 강한 고통과 심리적 혼동을 경험하는 아이들이 유기불안이라는 심리적 덫에 심각하게 걸려들게 됩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사고 또는 개인적 사유로 떠나갔을 때 남겨진 가족들로부터 정서적인 위안을 충분히 얻을 줄 아는 아이들은 피해가 최소화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예민하고 두려움이 많은 기질의 아이들은 쉽게 마음이 진정되지 않으며, 앞으로 한번 더 상실을 겪으면 자신의 마음이 붕괴되어 버릴 것이라는 식의 믿음이 마음 깊은 곳에 새겨지게 됩니다. 작은 상실감 마저도 자신으로서는 극복할 수 없으니 애착 대상을 어떤 경우에도 상실하지 않도록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한다는 믿음이 신경쇠약을 유발합니다. 이것이 유기불안 도식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자라나는 과정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닙니다만,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는 고통에 견줄 만한 상실이 어른에게는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어린 나이에 겪은 부모의 상실도 결국 잘 이겨내고 성장했는데, 어른으로서 어떤 친밀한 대상을 잃게 되는 것이 못견디게 두려울 까닭이 무엇입니까. 이성적인 판단에 의하면 별 것 아닌 일로 치부할 만도 합니다만 유기불안이라는 도식은 그렇게 이성적인 논리에 굴하지 않습니다. 앞의 예에서 보듯, 잘자란 성인이 되어 아주 훌륭한 기능을 하면서도 친밀한 사람의 약간의 몸짓에 그리도 애절하게 반응하는 것은 ‘무의식적인 유기불안 도식’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유기불안이라는 덫에 걸린 성인들의 연애는 마치 롤러 코스터를 타는 듯한 감정의 기복을 보입니다. 관계가 안정적이고 행복할 때에도 그만큼 감동적인 달콤함을 잃어버릴 때의 아픔에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아픔과 긴장을 견디지 못하게 되면 달콤한 관계 마저도 헌신짝 내버리듯 걷어차는 악순환을 되풀이하게 됩니다. 이들은 친밀한 관계에 대한 이상이 너무 높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눈높이를 맞추는 안정적인 관계는 너무 멀리 있다고 느낍니다. 아닙니다.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자기 마음 깊은 곳에 무자비하게 비논리적인 암묵적인 결론이 혹시 자리잡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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