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에서 지워진 김진관 칼럼들 중 몇 개를 옮깁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서로의 욕구와 감정이 만나서 화합하거나 충돌하는 장(場, field)입니다. 내 욕구 또는 감정을 스스로 잘 이해하고 있고, 그것을 상대에게 적절하게 잘 표현하고, 상대가 그것을 충분히 공감해주고 적절히 채워준다면, 그리고 알아주기와 채워주기가 일방적이지 않고 상호 간에 균형있게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화합입니다. 관계의 불협화음과 갈등은 자기 표현이 적절하지 않거나, 표현을 해도 상대가 알아주지 않거나, 알면서도 채워주지 않을 때 생겨나겠지요. 상대가 내 마음을 몰라줄 때의 좌절감이나 허망함은 무엇으로도 보상이 잘 되지 않는 깊은 상처가 됩니다. 사람이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대부분의 욕구는 다른 사람을 통해 채우도록 되어 있으니까요.
사람들을 자기 주장 또는 자기 표현의 정도에 따라 분류하면 크게 세 범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자기 표현이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이 첫번째 부류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들을 공격적(Aggressive)이라 표현합니다만 자기중심적이라는 표현이 더 무난할 듯 합니다. 이들은 상대의 욕구나 감정은 등한시하고 자신의 욕구와 감정을 언제나 우선시합니다. 자기 주장을 공격적으로 하고 상대가 따라주지 않으면 화를 내는 사람들이라면 두 말 할 것 없이 이 부류의 대표주자들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저없이 표현하는 데 상대가 처한 입장은 고려하지 못하는 근시안을 갖고 있는 것이 기본입니다. 행여 상대가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면서 내 뜻을 받아주지 않으면 급격하게 실망하는 당당함을 보이기도 합니다. 상대의 입장이 나와 다를 수 있음을 미리 살펴보는 마음이 있다면 이렇게 당당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이들은 남의 눈치를 여간해서는 살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겉보기에 공격적이지 않고 부드럽지만, 상대의 마음 살피기에 소홀하고 무관심하다면 역시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의 범주에 해당합니다. 자신과 파트너가 함께 나아가는 방향이 정확하게 자신의 뜻과 일치해서 행복한 경우, 상대가 혹시 자신의 뜻을 굽히고 희생한 결과는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맞춰주는 관계는 갈등이 쉽게 표면화되지는 않겠지만 조화로운 모습은 아니기에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평화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희생하고 배려하는 쪽에서 일방적으로 갈등이 차곡차곡 쌓여갈 가능성이 높은 것은 자명합니다. 게다가 어느 날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하면 그것을 풀어나갈 힘이 없습니다. 부족함 없이 안락하게 지내던 쪽에서는 상대의 돌발적인 태도에 대해 잘 지내다가 이제와서 갑자기 왜 그러느냐 하겠지요. 참으로 황당한 불만이라고 여기면서 그동안 해오던대로 계속 희생해주기를 은근히 바랄 수 밖에 없겠지요. 갈등 앞에서도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면 상대의 마음이 급격하게 돌아설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갑자기 자신이 희생하면서 상대에게 맞춰주는 쪽으로 돌아서는 것도 왠지 억울하게 느껴지겠지요. 진퇴양난입니다.
이런 경우 상대방은 전형적으로 자기주장이 부족한 소극적인 사람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욕구나 감정보다는 상대의 욕구나 감정에 늘 우선권을 두는 사람들입니다. 자기를 표현하는 것은 극히 제한하면서 상대의 마음을 살피는 데 주력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 일정 부분 자긍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관계의 조화를 위한 기본 태도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속적인 관심, 아름다운 배려와 희생 그리고 상대에게 채워주기를 말 없이 실행합니다. 상대가 행복해하는 것에 만족하고 관계의 행복을 느낍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관계에 내가 없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뒤늦게 조금씩 자신을 표현해보지만, 이 때에도 충분히 표현하기 보다는 은근히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이 상대의 마음을 관심있게 살펴 주었듯, 상대도 자신을 알아줄 것이라 믿는 것입니다. 하나 하나 낱낱이 말해줘서 비로소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은 왠지 비굴하고 구차하다고까지 여깁니다. 말하지 않아도 지극한 관심으로 알아주는 것 만이 진짜 사랑과 신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조금씩 표현해봐도 여전히 몰라주는 상대에게서 진한 배신감을 느낍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천천히 되살펴봅니다. 그동안 갈등이 없던 이 관계에서 행복을 느꼈던 것은 나의 것이 채워졌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채워주면서 언젠간 내 것이 채워지리라 희망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행복했던 게 아니라 상대가 편안했을 뿐임을 이제와서 절감합니다. 이젠 나도 나를 표현하고 채워야 한다고 느끼지만 상대의 표정은 요지부동입니다. 상대는 문제 인식이 전혀 없고 나만 속앓이를 하고 있는 지금 이 상태는 그저 배신감 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을 해야 내 느낌을 상대가 알아줄 지 난감합니다. 무심한 상대에게 갑자기 버럭 화를 내게 되지만 상대는 그저 황당하다는 표정이고 여전히 당당합니다. 내가 모난 성격의 소유자라는 식입니다. 구구절절 설명을 한다해도, 그럼 이제껏 왜 말하지 않았느냐는 핀잔이 돌아옵니다. 더욱 억울한 것은 그의 말이 맞긴 맞다는 생각도 들기 때문입니다. 왜 이제껏 말없이 배려하고 맞춰주기만 했던 걸까요. 결국 내가 못났다는 생각이 지배하면서 자신감이 급격이 떨어집니다. 어디에서 나를 다시 찾아야 하는 겁니까.
알맞은 자기 표현을 하는 세 번째 부류는 위에 제시한 어떤 오류도 범하지 않습니다. 적절한 자기 주장을 하는 사람들과 비교할 때 소극적인 사람들은 몇 가지 잘못된 가정법을 마음 안에 갖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표현할 때 상대가 반드시 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내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것은 애정의 부족이거나 거부감의 표현이라고 자동적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상대가 내게 요구해 올 때 내가 거절하지 못하는 이유가 됩니다. 상대가 상처받을까 염려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주장을 꼬박꼬박 한다는 것은 상대에게 부담을 주는 잘못된 태도라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자기 표현을 적절하게 한다는 것은 내 욕구와 상대의 욕구를 동등하게 인정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즉, 내가 요구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있는 것처럼 상대도 자유롭게 거절할 수도 있고 채워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대에 대한 애정이나 신뢰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쉽게 요구하고, 상대가 지금 채워주지 않아도 실망하거나 상처받지 않고, 내가 거부할 때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하고, 내가 채워줄 수 있을 때에느 기꺼이 해줄 수 있는 것입니다.
관계는 서로의 욕구와 감정이 만나서 화합하는 장입니다. 그런데 내 욕구와 감정을 적절히 표현하지 않는다면 어찌 화합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표현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것이 애정이라고 믿고, 꼬박 꼬박 표현하는 것은 과도한 요구라고 믿는 것은 미덕이 아니라 나에 대한 불신이고 나아가서 상대에 대한 불신입니다. 내가 상대에게 충분히 사랑받을 만한 사람인가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말하지 않아도 상대가 내 마음을 알아줄 정도로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지 확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표현하면 상대의 마음에 부담을 주고 결국 상대가 나를 귀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은 결국 상대에 대한 불신입니다. 자신의 욕구를 표현할 때마다 늘 채워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주 표현하고 거리낌 없이 표현하는 사람이 자기 욕구를 채울 기회를 훨씬 더 많이 갖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에도 크게 실망하지 않는 용기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관계에서 갈등과 좌절이 많은 사람들은 늘 소극적인 사람들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은 주로 자신을 표현하고 채우는 데에 관심을 두기 때문에 자신을 잘 맞춰주는 사람들을 가까이에 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좌절하고 실망할 만한 관계는 잘 만들지 않습니다. 상담소를 찾는 분들은 대부분 소심하고 소극적인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희생하는 것도 모자라서 관계가 절망스러울 때 다시 한번 자신을 탓하고 자신이 변하고 발전해야 한다고 믿는 분들이 심리치료를 찾게 됩니다. 그 분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한결같습니다. 관계의 조화를 위해서는 언제나 나 자신을 채우는 것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 스스로를 채우지 못한 사람은 상대를 지속적으로 안정감 있게 채워줄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내가 혹시 상대를 자기중심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데 일조하지는 않았는지 살펴볼 필요도 있습니다. 순서는 언제나 나, 너, 그리고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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