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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빙

[아카이빙] 하버드 특강 '정의' 1-1강: 벤담의 공리주의

by 정보까마귀 2022.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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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대학교 정치철학 교수, 마이클 샌델의 강의 '정의(Justice)' 내용을 아카이빙 목적으로 포스팅합니다. 국내에서는 EBS에서 <하버드 특강 - 정의>라는 이름으로 방영된 바 있으며, 아래의 내용은 EBS의 번역을 받아적은 것입니다. 강의 내용 중 학생들의 대답은 인용문으로 처리했습니다. 원본 영상 링크를 함께 첨부합니다.


 

1강: 벤담의 공리주의
PART 1: THE MORAL SIDE OF MURDER

 

‘정의’를 공부하는 이 강좌를 이야기 하나로 열어보겠습니다. 자신이 전차 기관사라고 가정해봅시다. 전차는 시속 100km 정도로 달리고 있는데 선로 앞쪽에 작업 중인 인부 5명이 보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전차는 멈추지 않습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것이죠. 당신은 필사적인 심정입니다. 전차와 충동할 경우 인부 5명이 죽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죠. 5명이 죽는 걸 기관사가 확실히 안다고 가정한 상황입니다. 당신은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러던 중 당신의 눈에 오른쪽으로 난 비상 철로가 들어옵니다. 그 비상 철로 끝에는 인부 1명이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핸들은 고장 나지 않았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방향을 바꿔 비상 철로로 가서 1명을 희생시키고 5명을 살릴 수 있죠.

 

첫 번째 질문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을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투표를 해봅시다. 비상 철로로 핸들을 꺾을 분은 손 들어주세요. 핸들을 꺾지 않고 앞으로 계속 가실 분? 아직 손 내리지 마세요. 몇 명 되지 않는군요. 대부분이 핸들을 돌린다고 했습니다. 이제 그렇게 판단한 이유를 알아봅시다. 왜 그게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다수에 속하는 분들의 이유부터 들어보죠. 비상 철로로 가겠다고 한 분들은 왜 그런 판단을 내렸나요? 판단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이유를 설명해주실 분 있습니까? 일어서서 말씀해주세요.

 

1명만 희생시킬 수 있는 상황에서 5명을 죽이는 건 옳지 않기 때문이죠.

 

1명만 희생시킬 수 있는 상황에서 5명을 죽이는 건 옳지 않답니다. 훌륭한 이유네요. 다른 의견은 없습니까? 모두 같은 이유인가요? 네, 말씀하세요.

 

저도 같은 이유를 떠올렸습니다. 우리는 911당시 여객기를 펜실베이니아 들판에 추락시킨 이들을 영웅이라고 생각합니다. 승객만 죽고 건물 안에 있는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죠.

 

911 당시에도 같은 원칙이 적용됐다는 얘기군요. ‘비극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1명을 죽이고 5명을 살리는 게 낫다.’ 그게 핸들을 돌리겠다고 한 분들의 판단 근거인가요? 그렇습니까?

 

이제 소수의견에 속한 분들, 핸들을 돌리지 않겠다는 이유를 들어보죠.

 

전 그 얘기가 학살이나 전체주의를 정당화하는 논리와 같다고 봅니다. 한 인종을 살리기 우해서 다른 인종을 쓸어버려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학생이 선택한 건 학살의 공포를 피하기 위해서 5명한테 전차를 몰고 가 죽이는 건가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요?

 

네.

 

좋습니다. 다른 의견 없나요? 어쨌든 용감한 답변이었어요. 고맙습니다. 이제 고민해볼 얘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다수 의견에 속했던 분들이 ‘1명을 죽이고 5명을 살리는 게 낫다’는 원칙을 이번에도 고수하는지 지켜봅시다.

 

이젠 당신은 전차 기관사가 아니라 구경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서 있는 곳은 전차 선로가 내려다보이는 다리고 그 아래 선로에는 전차가 다가옵니다. 그 선로의 끝에는 인부 5명이 있고 브레이크가 고장 난 전차는 5명을 덮치기 직전입니다. 이제 당신은 기관사가 아닙니다.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라 하는데 옆에 서 있는 사람이 눈에 띕니다. 다리에 기댄 채 서 있는 아주 뚱뚱한 남자가 말이죠. 여러분은 그 남자를 밀 수 있습니다. 그럼 남자는 다리 난간을 넘어가 선로 위에 떨어질 겁니다. 전차 선로 바로 위로 말이죠. 그럼 남자는 죽겠지만 인부 5명의 생명을 구할 겁니다.

 

다리 난간 너머로 남자를 밀어버릴 분 손 들어주세요. 밀지 않을 분, 손드세요. 대부분이 밀지 않겠다는군요. 그럼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 원칙은 왜 버려졌을까요? ‘1명을 죽이고 5명을 살리는 게 낫다’는 원칙은 어디로 갔죠? 첫 번째 이야기에서는 대부분이 그 원칙에 찬성하지 않았나요? 두 이야기에서 모두 다수 의견에 손을 든 분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두 이야기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두 번째 이야기는 사람을 밀어버리는 행동이 포함된 선택인 점이 다른 것 같아요. 그 행동이 아니면 이 상황과 전혀 관계가 없었을 사람을 끌어들이는 거죠. 그러니까 그 남자가 모면할 수 있었을 일에 그 남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그를 대신하여 선택하는 일은 첫 번째 이야기의 경우 월권이라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이야기의 기관사와 두 선로의 인부들은 이미 상황에 들어와 있으니까요.

 

하지만 비상 철로에서 혼자 일하고 있던 인부도 뚱보 남자와 마찬가지로 자기 생명을 희생하겠다는 선택을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 인부는 선로에 있었으니까…

 

그 남자는 다리 위에 있었어요! 할 말이 있으면 다시 발언기회를 드리죠. 네, 어려운 질문입니다. 대답은 잘 들었어요. 두 이야기의 다수 의견이 다른 이유를 설명해줄 학생 또 없습니까? 말씀하세요.

 

인부 1명과 5명이 등장하는 첫 번째 이야기에서는 1명과 5명 중에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어요. 전차 때문에 누군가는 죽게 돼있죠. 그게 꼭 내 행동 때문은 아닙니다. 전차가 달리고 있는 가운데 짧은 순간 선택을 하는 거죠. 반면 뚱뚱한 남자를 미는 건 살인이에요. 그 행동은 내가 제어한 것인 반면 전차는 내 제어 범위가 아닐 수 있습니다. 둘은 약간 다른 상황이라고 생각해요.

 

좋은 의견이었어요. 이 의견에 대해서 할 말이 있는 분? 그렇게 생각하면 딜레마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두 경우 모두 내가 죽을 사람을 정하니까요. 핸들을 꺾어 한 사람을 죽이는 것도 고의적으로 한 행동이고 사람을 밀어 떨어뜨리는 것도 자발적이고, 의식적인 행동입니다. 그러니까 두 경우 모두 우리는 선택을 하는 것이죠.

 

이 의견에 대해 할 말 있나요?

 

전 두 경우가 같다는 확신이 들지 않아요. 둘은 좀 달라 보입니다. 실제로 누군가를 선로로 떨어뜨려 죽이는 건 진짜로, 직접 사람을 죽이는 거죠.

 

자기 손으로 직접 미니까요.

 

그렇습니다. 그건 핸들을 돌려서 누군가의 죽음을 야기하는 것과 달라요. 그런데 적당한 얘기가 아닌 것 같네요. 제가 이 위에 있잖아요.

 

학생 이름이 뭐죠?

 

앤드루입니다.

 

앤드루 학생한테 질문을 하나 하죠. 다리 위, 학생 옆에 서 있는 뚱보 남자를 밀 필요가 없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남자는 아래로 열리는 문 위에 서 있고 학생은 손잡이를 돌려서 문을 열 수 있어요. 돌리겠습니까?

 

어쩐지 그건 더 잘못된 것 같은데요. 우연의 일치인지 제가 그 손잡이에 기대고 있었다고 가정하면 어떨까요? 아니면 그 전차가 그 함정문의 손잡이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고 할까요? 그럼 돌릴 수 있을 것 같네요.

 

좋습니다. 그렇기는 해도 첫 번째 경우와는 달리 뭔가가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 겁니다. 말씀하세요.

 

다시 말해, 첫 번째 이야기에서 우리는 그 상황에 직접 연관돼 있지만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그냥 구경꾼이죠. 그러니까 뚱뚱한 남자를 밀어서 상황에 말려들지 그러지 않을지를 선택할 수 있어요.

 

좋습니다. 이제 두 번째 경우도 잊읍시다. 어쨌든 좋은 의견이었어요.

 

새로운 경우를 상상해봅시다. 이제 여러분은 응급실의 의사고 환자 6명이 응급실에 왔습니다. 끔찍한 전차사고를 당한 사람들이죠. 5명은 그리 심하게 다치지 않았고 1명은 중상입니다. 여러분은 하루 종일 중상을 입은 환자만 치료할 수도 있지만 그럼 5명은 죽습니다. 반면 같은 시간 동안 5명을 치료해 건강을 회복시킬 수도 있죠. 그럼 중상을 입은 1명이 죽습니다. 이제 의사가 된 여러분 중에서 5명의 생명을 구할 분? 1명을 구할 분은 얼마나 되죠? 숫자가 아주 적군요. 극소수에 불과하네요. 이유는 아마 같을 겁니다. 1명이냐 5명이냐의 선택이죠. 이제 의사가 된 또 다른 경우입니다.

 

이번에 여러분은 이식수술 전문의사이고 5명의 환자가 찾아왔는데 모두 다 살기 위해서는 장기이식이 꼭 필요합니다. 한 명은 심장, 한 명은 폐, 한 명은 신장, 한 명은 간, 한 명은 췌장이 필요하죠. 그런데 장기 기증자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환자가 죽는 걸 보게 생겼죠. 그러다 이런 생각이 떠오릅니다. 옆방에 가면 건강검진을 받으러 온 건강한 남자 하나가 있는데 그 남자는… 얘기가 마음에 드나 보죠? 그 남자는 낮잠을 자는 중입니다. 여러분은 조용히 옆방에 들어가 장기들은 빼내올 수 있어요. 그럼 그 사람은 죽지만 여러분은 5명을 구할 수 있죠. 그렇게 하겠다는 분? 없습니까? 그렇게 할 생각이 있는 분은 손을 들어주세요. 2층에도 없습니까?

 

전 그렇게 할 겁니다.

 

그래요? 조심하세요. 난간에 너무 많이 기대지 마시고요. 그렇게 하지 않을 분? 좋습니다. 2층에 계신 분의 생각을 들어보죠. 이유가 뭐죠?

 

사실 저는 조금 다른 대안을 생각했습니다. 이식수술이 필요한 5명 중 1명 죽으면 그 사람의 건강한 장기들을 이용해 나머지 4명을 살리는 것이죠.

 

멋진 아이디어로군요. 멋진 아이디어이기는 하지만 학생은 방금 내 철학적 질문의 요점을 망가뜨리고 말았어요! 어쨌든 그 이야기들과 우리의 토론에서 한 걸음 물러서서 논의가 전개된 방식 두어 가지에 주목해봅니다. 몇몇 도덕적 원칙들은 조금 전 토론에서 이미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그 도덕적 원칙들이 어떤 것인지 함께 생각해 보죠.

 

토론에서 나타난 첫 번째 도덕적 원칙은 올바른 일, 즉 도덕적인 일인지의 여부가 우리 행동이 야기할 결과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어쨌든 1명이 죽는 게 5명이 죽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죠. 이것은 결과론적 도덕 추론의 한 가지 예입니다. 결과론적 도덕 추론은 행동의 결과에 따라 도덕성을 판단합니다. 우리 행동이 변화시킬 세상의 모습으로 도덕성을 판단하죠.

 

하지만 우리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다른 경우들을 고민할 때 우리는 결과론적 도덕 추론에 그다지 큰 확신을 갖지 못했죠. 뚱뚱한 남자를 다리 너머로 밀어버리는 걸 망설이거나 아무 것도 모르는 환자의 장기를 빼내오는 걸 망설였을 때 우리가 보여준 추론의 방향은 결과에 상관없이 행동 그 자체의 본질적 성격을 고려했다는 걸 보여줍니다. 우리는 주저했습니다. 그게 옳지 않다고 생각했죠.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건 원칙적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5명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말이죠. 적어도 우리가 상상해 본 이야기들의 두 번째 경우에서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두 번째 범주를 보여줍니다. 도덕 추론의 두 번째 범주요. 정언적 도덕 추론은 절대적인 도덕규범들에 따라 도덕성을 판단합니다. 절대적인 의무와 권리에 따라 판단하죠. 결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앞으로 며칠 혹은 몇 주 동안 우리는 결과론적 도덕 원칙과 정언적 도덕 원칙의 차이를 알아볼 것입니다.

 

결과론적 도덕 추론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것은 공리주의입니다. 18세기의 영국 정치철학자 제러미 벤담이 만들어낸 사상이죠. 정언적 도덕 추론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자는 18세기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도덕 추론을 살펴보고 평가하고 다른 도덕 추론도 살펴볼 것입니다. 강의 요강에는 우리가 읽을 위대하고 유명한 책들이 소개돼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존 로크, 임마누엘 칸트, 존 스튜어트 밀 등의 저자가 쓴 책들이죠. 강의 요강을 보면 우리가 읽는 게 고전만이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철학적 질문을 제기하는 오늘날의 정치적, 법적 논쟁도 다룰 것입니다. 우리의 토론은 평등과 불평등, 소수집단 우대정책, 언론자유와 증오발언, 동성결혼, 징병제도 등 현실의 다양한 문제를 다룹니다. 이유가 뭐냐고요? 오래되고 추상적인 책들에 활기를 불어넣는 동시에 정치를 포함한 일상생활 속의 문제들을 끌어내고, 명확하게 밝혀서 철학을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책들을 읽고 이런 문제들을 토론하고 이것들이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아주 매력적인 얘기 같겠지만 여러분한테 경고부터 해야겠습니다. 제 경고는 이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이 책들을 읽으면, 그러니까 자기인식을 위해 이 책들을 읽으면 몇 가지 위험이 닥칠 수 있습니다. 개인적이고 정치적인 위험, 정치철학을 공부하는 학생은 누구나 알고 있는 위험입니다. 이 위험은 철학이 우리를 가르친다는 사실과 이미 알고 있는 사실에 맞서게 만들며 우리를 뒤흔든다는 사실에 기인합니다.

 

아이러니도 존재합니다. 이 강좌의 까다로움은 여러분이 이미 아는 것을 가르쳐준다는 점에 기인합니다. 우리에게 친숙하고 당연했던 것들을 가지고 와서 그것들을 낯설게 만들기 때문이죠. 우리가 살펴본 예들도 그런 것들입니다. 강의를 시작하며 제시했던 장난기와 진지함이 섞인 가정들 말입니다. 이 철학서들도 그런 방식을 취합니다. 철학은 친숙한 것들을 낯설게 하는데 그 방법은 새 정보를 제공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관점을 이끌어 내는 것이죠.

 

여기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친숙한 것들이 낯설어진 뒤에도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자기 인식은 순수함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인식으로 불안을 느낀다고 해도 생각과 지식을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이 공부가 어렵고도 매력적인 이유는 도덕철학과 정치철학이 이야기이기 때문이며 그 이야기가 어떻게 될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건 그 이야기가 우리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그게 개인적인 위험이죠.

 

그럼 정치적인 위험은 어떤 것일까요? 이런 강좌를 소개하는 방법 중 하나는 이런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이 책들을 읽고 이 문제들을 토론하면 더 훌륭하고 책임감 있는 시민이 된다’, ‘공공정책이 뭘 가정하는지 검토하며 정치적 판단력을 기르게 될 것이다’, ‘공공의 일에 더 능률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된다’는 약속이죠. 하지만 이런 약속들은 불공정하며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일반적으로 말해 정치철학은 그런 효과를 낳지 않습니다.

 

이런 가능성도 염두에 두십시오. 정치철학 때문에 여러분이 더 나쁜 시민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죠. 훌륭한 시민이 되기에 앞서 나쁜 시민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십시오. 철학은 거리를 두는 학문, 무력화시키는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소크라테스한테서도 확인할 수 있죠. <고르기아스>에는 소크라테스와 친구 칼리클레스의 대화가 나옵니다. 칼리클레스는 소크라테스가 철학하는 걸 중단시키려고 합니다. 칼리클레스는 소크라테스한테 말하죠. “철학은 예쁘장한 장난감이다”, “적당한 시기에 적당히 빠지는 건 괜찮지만 지나치게 철학을 추구하면 사람을 망친다”고 말입니다. 칼리클레스는 말합니다. “내충고를 듣게. 논쟁을 그만두게”, “활동적인 사람들이 이룬 것을 배우게”, “시시한 궤변에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을 귀감으로 삼지 말고 돈을 잘 벌고, 평판이 좋고 여러 복을 타고난 사람을 귀감으로 삼게” 즉, 칼리클레스가 소크라테스한테 한 말은 “철학은 집어치워. 정신 좀 차려 경영대학원이나 가”였던 겁니다. 칼리클레스의 말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철학은 관습적인 것이나 기존의 관념, 신념에서 우리를 떼어놓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개인적이고 정치적인 위험입니다.

 

이런 위험에 맞닥뜨릴 때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반응은 회피죠. ‘회의주의’란 이름의 회피입니다. 회의주의는 이런 식의 생각이죠. ‘우리는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했어’, ‘강의를 시작하며 상상한 이야기나 논의한 원칙들에 대해 결론을 짓지 못했지’, ‘아리스토텔레스나 로크, 칸트, 밀도 그 오랜 기간 동안 풀지 못한 문제를 하버드 대학 극장에 모인 우리가 어떻게 한 학기 만에 풀겠어?’, ‘원칙은 각자가 알아서 할 문제고 거기에 대한 토론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 ‘이치를 따지는 건 불가능해’라고 말하는 게 바로 회피이고 회의주의입니다. 거기에 대해 저는 이런 대답을 내놓고 싶습니다. 이 문제들이 아주 오랫동안 논의돼왔다는 점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반복적으로 제기돼 왔고 사라지지 않았다는 바로 그 점이 비록 해결은 불가능 하지만 이 문제들을 피할 수도 없다는 걸 보여주는 게 아닐까요?

 

그 문제들을 회피할 수 없는 이유, 그 문제들에서 도망칠 수 없는 이유는 우리의 일상이 이 문제들에 대한 답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도덕적 고민을 포기하는 회의주의는 해결책이 아닙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회의주의란 문제를 다음과 같이 멋지게 설명했습니다. “회의주의는 인간 이성의 쉼터다”, “그곳에서 이성은 이념적 방황에 대해 성찰할 수 있지만 그곳에 영구적으로 정착해 살 수는 없다”, “회의주의에 굴복한다면 이성의 동요를 절대 극복할 수 없다”. 이 이야기들과 토론을 통해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위험과 매력, 가능성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런 얘기죠. 이 강좌의 목적은 이성을 일깨워 방황하게 만들고 그것이 무엇을 이끌어내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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